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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 신춘문예 작품들 > 2007년 신춘문예(시) 시인 추경희
  2007년 신춘문예(시)
  글쓴이 : 추경희 날짜 : 07-02-22 00:52     조회 : 1464    
서울신문

연금술사의 수업시대/이강산



세상에서 가장 낡은 한 문장은 아직 나를 기다린다.

손을 씻을 때마다 오래전 죽은 이의 음성이 들린다. 그들은 서로 웅얼거리며 내가 놓친 구절을 암시하는 것 같은데 손끝으로 따라가며 책을 읽을 때면 글자들은 어느새 종이를 떠나 지문의 얕은 틈을 메우고 이제 글자를 씻어낸 손가락은 부력을 느끼는 듯. 가볍다. 마개를 막아놓고 세면대 위를 부유하는 글자들을 짚어본다. 놀랍게도 그것은 물속에서 젤리처럼 유연하다. 그리고 오늘은 글자들이 춤을 추는 밤 어순과 문법에서 풀어져 서로 뭉쳤다 흩어지곤 하는. 도서관 세면기에는 매일 새로운 책이 써지고 있다.

마개를 열어 놓으며 나는 방금 씻어낸 글자들이 닿고 있을 생의 한 구절을 생각한다. 햇빛을 피해 구석으로 몰린 내 잠 속에는 오랫동안 매몰된 광부가 있어 수맥을 받아먹다 지칠 때면 그는 곡괭이를 들고 좀 더 깊은 구멍 속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가 캐내온 이제는 쓸모없는 유언들을 촛농을 떨어뜨리며 하나씩 읽어본다. 어딘가 엔 이것이 책을 녹여 한 세상을 이루는 연금술이라고 쓰여 있을 것처럼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세상에서 오래도록 낡아갈 하나의 문장이다. 언젠가 당신이 나를 읽을 때까지 목소리를 감추고 시간을 밀어내는 정확한 뜻이다.

 


심사평-유연한 언어구사 돋보여

예선을 통과해 올라온 작품들 가운데 우선 배호남의 ‘사군자의 꿈’, 백상웅의 ‘층층나무의 잠’, 김강산의 ‘엉덩이’, 이산(본명 이강산)의 ‘연금술사의 수업시대’, 박은지의 ‘진짜이든 가짜이든 어쨌든 가방’ 등이 논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서 다시 대상자를 좁혀 이산의 ‘연금술사의 수업시대’와 박은지의 ‘진짜이든 가짜이든 어쨌든 가방’이 최종적인 검토의 대상이 되었다. 배호남의 ‘사군자의 꿈’은 잘 다듬어져 시적 안정감을 느끼게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작품들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 약점이었고, 백상웅의 ‘층층나무의 잠’은 현실적인 체험의 추상적 표현이 그 나름의 객관성을 확보하기에는 조금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김강산의 ‘엉덩이’는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였지만 외설적인 부분을 조금 순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산의 ‘연금술사의 수업시대’와 박은지의 ‘진짜이든 가짜이든 어쨌든 가방’은 두 편 모두 장단점이 있어 어느 것을 당선작으로 해야 할지 선뜻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전형적인 신춘문예 유형의 작품이기는 하지만 이산의 ‘연금술사의 수업시대’는 그 유연한 언어 구사와 분방한 상상력으로 미루어 볼 때 앞으로 시인으로서의 성장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여겨졌다. 박은지의 ‘진짜이든 가짜이든 어쨌든 가방’은 명품 백과 가짜 백을 대비, 여성들의 내면적 심리를 실감나게 살려냈다. 그러나 기성시인의 작품을 모방한 흔적이 엿보였다는 것이 약점이었다. 결국 보다 유연하고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를 보여 준 이산의 ‘연금술사의 수업시대’를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신경림 최동호



경향신문

부레옥잠/신미나



몸때가 오면 열 손톱마다 비린 낮달이 선명했다

물가를 찾는 것은 내 오랜 지병이라, 꿈속에서도 너를 탐하여
물 위에 空房(공방) 하나 부풀렸으니 알을 슬어 몸엣것 비우고 나면 귓볼에
실바람 스쳐도 잔뿌리솜털 뻗는거라 가만 숨 고르면 몸물 오르는
소리 한 시절 너의 몸에 신전을 들였으니

참 오랜만에 당신
오실 적에는 불 밝은 들창 열어두고 부러 오래 살을 씻겠네 문 밖
에서 이름 불러도 바로 꽃잎 벙글지 않으매 다가오는 걸음소리에
귀를 적셔가매 당신 정수리 위에 뒷물하는 소리로나 참방이는 뭇
별들 다 품고서야 저 달의 맨낯을 보겠네


심사평


한편의 시의 탄생은 한 생명의 탄생 만큼 눈부신 일이다. 수많은 독자의 기대를 받으며 신춘 정월 초하루에 태어난 시는 분명 축복받은 시임에 틀림없다. 금년도에도 그런 시가 태어났다.

당선작으로 뽑힌 신미나의 ‘부레옥잠’은 부유성 수초인 ‘부레옥잠’이라는 작은 사물을 섬세하게 묘사하여 서정성의 깊은 완성을 획득한 시이다.

“몸때가 오면 열 손톱마다 비린 낮달이 선명했다//…가만 숨 고르면 몸물 오르는 소리 한 시절 너의 몸에 신전을 들였으니…”

시대와 삶을 투시하는 사상성이나 새로운 언어의 탐색은 없다 하더라도 사물에 대한 정감과 생명에 대한 여성적 상상력으로 넘치고 있는 빼어난 작품이다.

이 작품과 함께 끝까지 선자들의 손에 남았던 작품으로는 유병록의 ‘흰 와이셔츠오리떼’, 김서영의 ‘자벌레’, 박미산의 ‘파티마는 천왕봉에서 나를’, 박성준의 ‘에스컬레이터도 밟으면 꿈틀한다’, 김초영의 ‘스트렌딩 증후군’, 박도준의 ‘젖은 구두’ 등이었다.

볼링장의 레인과 벗어나지 못하는 일상을 절묘한 비유로 풀어낸 ‘흰 와이셔츠오리떼’, 엎드린 당신의 발을 끈질기게 물고 있는 삶의 늪을 묘사한

‘젖은 구두’, 작은 생명에 대한 놀라운 순간을 환희로 포착해낸 ‘자벌레’ 등은 충분한 수준을 보여주는 가편이었다.

시는 언어 예술의 정점이다. 필연성 없는 산문성의 경향, 언어의 무절제한 낭비, 소통 불가의 시들이 범람하는 이 시대에 치열한 시정신과 절제된 언어로서 서정시 본래의 감동을 획득하는 시인이 되기를 기대한다.

〈시인 김종해·문정희〉


 

문화일보

구름에 관한 몇 가지 오해/김 륭



1.
실직 한 달 만에 알았지 구름이 콜택시처럼 집 앞에 와 기다리고 있다는 걸

2.
구름을 몰아본 적 있나, 당신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단 한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내가 내 머리에 총구멍을 낼 거라는 확신만 선다면 얼마든지 운전이 가능하지
총각이나 처녀 딱지를 떼지 않은 초보들은 오줌부터 지릴지 몰라
해와 달, 새떼들과 충돌할지 모른다며 추락할지 모른다며 울상을 짓겠지만
당신과 당신 애인의 배꼽이 하나인 것처럼 하늘과 땅의 경계를 가위질하는 것은 주차딱지를 끊는 말단공무원들이나 할 짓이지
하늘에 뜬 새들은 나무들이 가래침처럼 뱉어놓은 거추장스런 문장일 뿐이야
쉼표가 너무 많아 탈이지 브레이크만 살짝, 밟아주면 물고기로 변하지

3.
구름을 몇 번 몰아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해나 달을 로터리로 낀 사거리에서 마음 내키는 데로 핸들만 꺾으면 집이 나오지
붉은 신호등에 걸린 당신의 내일과 고층아파트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보다 깊은 어머니 한숨소리에 눈과 귀를 깜빡거리거나 성냥불을 긋진 마
운전 중에 담배는 금물이야
차라리 손목과 발목 몇 개 더 피우는 건 어때? 당신
꽃 피우지 않고도 살아남는 건 세상에 단 하나, 사람뿐이지 왔던 길을 되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건 새가 아니라 벌레야
구름이란 눈이나 귀가 아니라 발가락을 담아내는 그릇이란 얘기지 잘 익은 포도송이처럼 말이야 그걸 아는 나무들은 새를 신발로 사용하지
종종 물구나무도 서고 말이야 생각만 해도 끔찍해
구름이 없으면 세상이 얼마나 소란스러울까

4.
아주 드문 일이지만 콜택시처럼 와 있는 구름의 트렁크를 열어보면
죽은 애인의 머리통이나 쩍, 금간 수박이 발견되기도 해
초보들은 그걸 태양이라고 난리법석을 떨지



심사평 시적 발상·상상력 뛰어나… 현실고통을 경쾌하게 노래


최종심까지 논의된 작품은 최찬상의 ‘폐가 앞에서’, 이용헌의 ‘게발’, 김륭의 ‘구름에 관한 몇 가지 오해’ 등 3편이었다. ‘폐가 앞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무난하고 안정돼 있다는 점에서, ‘게발’은 시적 형성력이 뛰어나고 감동을 주는 부분이 있으나 외국인 노동자 문제를 다룬 점이 다소 진부하다는 점에서 먼저 제외되어 ‘구름에 관한 몇 가지 오해’를 당선작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구름에 관한 몇 가지 오해’는 시적 발상과 그 상상력이 뛰어나다. 그의 상상력은 기발하고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경쾌하기까지 하다. 그의 시를 읽다 보면 현실의 크고 작은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 될 정도로 마취당한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의 상상력에서 오는 이 위안의 마취력은 실은 현실의 고통에서 나온 것이다.
이 시는 화자의 능청스러운 독백이 시종일관 시 전체를 끌고 가는데, 그 화자는 실은 대응력이 결핍된 실직자다. 실직당한 이의 고통스러운 현실적 상상력이 이러한 역설적 상상력의 시를 낳은 것이다.
선자들은 그의 상상력의 뿌리가 견딜 수 없는 삶의 고통스러움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에 크게 신뢰가 갔다. 엄숙함과 진지함에서 벗어나 이토록 경쾌하게 고통을 노래함으로써 우리를 위로해주는 시도 드물다.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심사위원 천양희·정호승


 

세계일보

근엄한 모자/이기홍


오늘 예식장에 그를 데려가기로 합니다
그는 내 가슴속에 살면서도
맨 위에 올라가 군림하기를 좋아합니다
어쩌면 그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끔, 내 든든한 밑바탕이 되어주는 그가
차갑고 근엄한 얼굴을 치켜들면
사람들은 그에게 다가가
다소곳이 머리를 조아립니다
예식장에 초대받아 온 사람들도
나보다는 그에게
더 깊은 관심을 표하기도 해 속이 몹시 상합니다
이제 그가 없으면 나는
사람들의 괄호 밖으로 밀려날지 모릅니다
그래서 난 외려 그의 보디가드가 됐습니다
그의 뾰족한 코가 땅바닥에 곤두박질치진 않을까
낯선 바람에라도 끌려가 낭패를 당하지 않을까
조금도 맘놓지 못하고 그를 지켜봐야 합니다
슬그머니 내 위까지 올라와 상전이 된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나 나는 이렇게
나와 다르게 살아야 하나요
그를 몰아내고 청바지 입기를 좋아하는
나를 데려올 수는 없나요



심사평 유종호·신경림


비슷비슷한 내용, 비슷비슷한 형식의 작품들이 너무 많았다. 불필요하게 산문 형식을 취하고 있거나, 억지로 만든 흔적이 앙상하게 드러나 있는 시도 적지 않았다. 무언가 깊이 생각하고 대상을 주의 깊게 보려는 자세를 보기 어렵다는 점이 아쉬웠다. 널리 유행하는 시 창작 강좌 등의 부정적 영향이 아닌가 싶었다. 아무리 시를 보는 눈이 바뀌어도 지극히 개성적이고 다른 사람이 가지지 못한 시각을 가졌을 때 좋은 시가 된다는 점만은 달라질 수 없을 것이다.
구민숙의 시들은 시의 전개도 날렵하고 말의 구사도 자못 신선하다. 특히 ‘자꾸 헛것처럼’ 같은 시는 흠잡을 데 없이 꽉 짜인 시로 읽히며, ‘귀가’ 같은 시도 기성 시인의 것이라면 충분히 우수한 시로 거론될 법하다. 하지만 투고돼온 다른 사람들의 시와 내용이나 형식에 있어 크게 다르지가 않다. 문정인의 시 가운데서는 외국인 노동자를 다룬 것으로 보이는 ‘오카리나 부는 오빠’가 속도감도 있고 가장 재미있게 읽힌다. ‘옥탑방 여자’도 밝고 환하면서도 서글픈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작자의 만만찮은 솜씨를 보여준다. 다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고 많이 들은 것 같은 이미지요 정서인 것이 흠이다. 이들 둘에 비해 최찬상의 시들은 덜 다듬어진 듯하면서도 개성적이다. 그러나 ‘쿵’이 발상이나 시법에 있어 아주 새로운 데 반하여, ‘자전거’나 ‘희망의 길’ 같은 시는 아직 치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걱정을 떨쳐버리기 어렵게 만든다.
이기홍의 시도 개성적이라는 점이 먼저 호감을 갖게 한다. 특히 ‘근엄한 모자’는 속물화돼 가고 있는 주변에 대한 야유이면서 동시에 똑같이 속물화돼 가고 있는 자신에 대한 야유이기도 함으로써 감동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사색과 고뇌의 궤적도 엿보일뿐더러 문명비평적인 시각까지 담보하고 있는 수작이다. 이에 비해서 ‘푸른 바람의 집’이나 ‘내 몸속을 구르는 돌’은 내용이나 형식에 있어 미흡하다.
이상 네 사람의 작품을 놓고 논의한 끝에, 작품의 편차가 좀 불안하기는 했으나, 드물게 개성적이라는 점, 동세대 시인에게 결여돼 있는 사색적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는 점 등을 높이 평가해서, 어쩌면 모험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심사자들은 이기홍의 ‘근엄한 모자’를 당선작으로 뽑는 데 합의했다.



한국일보

엘리펀트맨/이용임


사내의 코는 회색이다
잠들지 못하는 밤마다
사내는 가만히 코를 들어올린다
형광불빛에 달라붙어 벌름거리는
사내의 콧속이 붉은지는 알 수 없다
여자를 안을 때마다
사내는 수줍게 코를 말아올리고 입술을 내민다
지리멸렬한 오후 두시에
사내는 햇빛을 쬐며 서툴게 담배를 핀다
사내의 코가 능숙하게 따먹을
푸르고 싱싱한 나뭇잎들은 없다
계절은 바람과 구둣소리에 쓸려
태양의 서쪽으로 이동했다
구내식당에서 이천오백원짜리 밥을 먹을 때마다
사내는 코끝이 벌개질 때까지 힘껏 코를 들어올린다
버스가 급정거할 때마다
손잡이에 걸린 코를 황급히 움켜쥐며 한숨을 내쉰다
담배연기와 밀어와 휘파람과 잠꼬대
사내의 긴 코 어딘가에서 아직도 바깥으로 흘러나오고 있을
환절기가 되면 사내는 지독한 축농증을 앓는다
가을마다 잎이 다 떨어진 나무 아래 서서
사내는 코로 낙엽을 주워올린다
가지에 올려놓은 잎사귀가 떨어질 때마다,
다시


심사평 기성 시단 상투성 벗어난 독특함 지녀

금년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심사에 임하면서 심사위원들이 가장 기대한 것은 무슨 특출난 개성의 출현이나 세련된 이미지의 조형 능력 같은 것은 아니었다. 다양함이나 분방함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미 한국 시단에 차고 넘친다는 생각이 들었고 적어도 본심에 오른 작품의 경우 언어를 다루는 기량 면에서는 다 어느 수준 이상을 유지하고 있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박한 차원에서나마 읽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절실함을 간직하고 있는 시, 삶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개안(開眼)을 보여주는 시는 의외라 할 만큼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쓴 사람 자신의 영혼이 충분히 고양되지 못한 가운데 서둘러 마무리된 흔적이 역력한 작품들이 상당수였다. 그런 응모작일수록 절제와 균형이 부족했고 산문적 요설이나 추상적 관념의 나열로 흐르는 경향이 많았다.

고심 끝에 심사위원들은 다음 두 응모자의 작품들로 선택의 폭을 좁히는 데 합의했다. <흰목물새떼> 외 2편의 작품을 투고한 박현진씨의 경우 언어를 다루는 장인적 기량이 우선 믿음을 주었다. 묘사의 구체성이 살아 있으면서도 신산스런 삶의 한 귀퉁이를 포착해내는 눈길이 범상치 않았다. 특히 투고작 가운데 <부황자국>은 여자의 몸을 공간 이미지를 빌어 생동감 있게 형상화하고 있었다. <엘리펀트맨> 외 4편을 투고한 이용임씨의 작품은 기성 시단의 상투형을 훌쩍 벗어난 독특함을 지니고 있었다. 소시민의 일상을 우화적으로 형상화한 이 작품은 평이하고 단조로운 듯하면서도 가시적 지평을 넘어선 다른 세계를 현현시키는 힘을 보여주고 있다.

논란 끝에 심사위원들은 최종적으로 <엘리펀트맨>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모범답안 같은 안정감보다는 아직 미정형이긴 하지만 뭔가 새로운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는 듯 여겨지는 이 응모자의 미래를 믿어보기로 한 것이다. 앞으로도 섣부른 잠언의 유혹에 빠지지 말고 보다 긴장된 언어와의 싸움을 주문하고 싶다. 당선자에게 축하의 마음을 전하며 다른 응모자들에게도 건필을 당부하고 싶다.

심사위원=김승희(시인ㆍ서강대 국문과 교수) 김사인(시인ㆍ동덕여대 문창과 교수) 남진우(시인 문학평론가ㆍ명지대 문창과 교수)


 

조선일보

트레이싱 페이퍼/김윤이



잘 마른 잎사귀가 바스락거리며 나를 읽네
몇 장 겹쳐도 한 장의 생시 같은,
서늘한 바람 뒤편
달처럼 떠오른 내가 텅 빈 아가리 벌리네
지루한 긴긴 꿈을 들여다봐주지 않아 어둠이 흐느끼는 밤
백태처럼 달무리 지네
일순간 소낙비 가로수 이파리, 눈꺼풀이 축축하게 부풀어 오르고
거리마다 지렁이가 흘러넘치네
아아 무서워 무서워
깨어진 잠처럼 튀어 오른 보도블록,
불거져 나온 나무뿌리
갈라진 혓바닥이 배배 꼬이네
비명이 목젖에 달라붙어 꿈틀대네
나는 이 길이 맞을까 저 길이 맞을까
손바닥에 침을 퉤퉤 뱉고 싶지만
손금이 보이지 않는 손
금 밟지 않기 놀이하듯 두 다리가 버둥대네
두 동강난 지렁이 이리저리 기어가고
구름을 찢고 나온 투명한 달
내 그림자는 여태도록 나를 베끼고 있네


심사평 사근사근 풀어내는 언어감각 돋보여


시인 문정희·황지우

시와 인간이 만나는 장소는 언어와 리듬이다. 산문과 시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는 많은 응모작들을 읽으며, 이 광활한 시대에 개성적이면서도 깊은 시정신을 내포한 시인을 찾는 작업이 지난함을 느꼈다.
수천통의 응모작 가운데 예심을 통과한 작품들이어서 그런지 대체로 긴장감이 팽팽했지만, 삶의 삼투압이 시 속에 스며들지 못한 작품들이 많았고, 이는 곧 언어의 낭비로 이어졌다.
마지막까지 논의되었던 작품은 이주연의 ‘21세기,실낙원’, 박여주의 ‘신호대기’, 권지희의 ‘직소 퍼즐’, 이산의 ‘낭만적인 잠수부의 작은 눈’, 김윤이의 ‘트레이싱페이퍼’ 등이었다.
시 최종심을 갖고 있는 시인문정희(오른쪽) 황지우씨/이명원기자
이 중에 이주연의 ‘21세기, 실낙원’은 검은 비닐속에 자라는 생명을 통하여 이 시대의 불임성을 묘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끝마무리가 허전하여 읽는 이를 깊은 감동으로 이끌지 못한 점이 아쉬었다. 박여주의 ‘신호대기’는 자연스러운 솜씨로써 삶을 투시하는 힘이 느껴졌지만, 관념어의 돌출과 몇 군데 표현이 클리쉐(cliche)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당선작으로 김윤이의 ‘트레이싱페이퍼’를 정하는 데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쁜 숨결 속에서도 잘 유지되는 묘사력과 활달한 상상력으로 개성을 한껏 발휘하고 있었다. 이 작품과 함께 응모한 작품에서 보여지는 다소 시류적인 어투와 산문성은 이 시인이 앞으로 극복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근사근 시를 풀어내는 언어감각은 앞으로 한 시인으로서의 항해에 눈부신 햇살을 예고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새 시인의 출발을 축하한다. 한국시의 가장 예민한 촉수로서, 힘차게 비상해 줄 것을 믿는다.



중앙일보

침몰하는 저녁 / 이혜미

내가 밑줄 친 황혼 사이로 네가 오는구나. 어느새 귀밑머리 백발이 성성한 네가 오는구나 그 긴 머리채를 은가루 바람처럼 휘날리며 오는구나. 네 팔에 안긴 너는 갓 태어난 핏덩이, 붉게 물든, 모든 저물어가는 것들의 누이가 되어 오는구나 네가 너에게 젖을 물리고 세계의 발등이 어둠으로 젖어든다. 너의 모유는 계집아이의 초경혈마냥 붉고 비리고 아픈 맛, 나는 황홀하게 너의 젖꼭지를 덧그리고 있었다

내가 붉게 표시해 둔 일몰이 세상으로 무너져 내리던 날 배냇시절의 너를 안고 네가 나에게 오는구나 네가 발 디디던 곳마다 이름을 버린 잡풀 잡꽃들이 집요하게도 피어나던 거라. 옅은 바람에도 불쑥 소름이 돋아 위태로운 것들의 실뿌리를 가만 더듬어 보면 문득, 그 뿌리들 내 속으로 흘러 들어와 붉게 흐르고 나 역시도 이름 버린 것들의 누이가 되고 말 것 같은데

나에게 진한 붉음으로 표식을 남긴 저물녘을 건너 비로소 네가 오는구나. 세계는 자꾸 움츠러들며 둥글어지려 하고 잘려진 나의 탯줄에 다시 뿌리가 내리면, 너는 저물며 빛을 키우고 빛이 저물며 어둠을 잉태하고 어둠이 다시 너를 산란한다. 그 속에서 나도 세상과 함께 움츠러들며 둥글어지던 것인데, 처음으로 돌아가려던 것인데, 내 속의 실뿌리들이 흔들리며 누이야 누이야, 내가 버리고 온 나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던 거라. 물관으로 흐르는 맑은 피는 양수가 되고… 체관으로 흐르는 진득한 피가 세계에 지천으로 꽃을 피워내는데… 아아 네가 오더구나, 모든 것들의 처음과 끝인 네가 오더구나



심사평  `1920년대 이상화 시인의 운율 느껴져`

핵과(核果)가 여무는 기다림의 가을 초입에 신인을 찾는 마음은 추억과 즐거움을 준다. 본심에 올라온 작품에서 한 편의 시를 선하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는 기준을 세우고 심사하였다. 주류 현상에 몸 섞어 흘러가는 시가 아닌, 자기 주술에 빠져 허우적대는 이름이 아닌 심저(心底)에서 직접 시의 무늬를 건져 올리는 시인이기를 바란다.

최종심에서 거론된 강미라('국수나무가 열리는 계절' 등) 이산('글자를 씻다' 등) 김혜정('나무의 애인' 등) 백상웅('코끼리 무덤' 등) 씨의 작품들은 자기 목소리를 가졌음에도 부분 부분 형상의 방심이 드러나고 상이 지나치게 뚜렷하여 이미지가 손상되는 범상성과 작품 수준의 격차가 눈에 띄었다.

아침 저쪽의 어두운 저녁을 유려한 시행으로 끌고 간 자정(自淨)의 리듬을 높이 사서 이혜미씨의 '침몰하는 저녁'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새로운 역할의 시는 근대성에 가까이 있는 것에만 있지 않고 먼 곳이나 소외된 것들의 품속에서 이루어지는 예외가 있다. 당선작은 분주하고 잡다하지 않은 순진한 사색으로 '너'와 '나'를 동일성 속에서 비춰보는 작품이다.

1920년대 이상화 시인의 호흡과 운율을 턱 빌려온 듯한 시법이 오히려 이 작품을 돋보이게 한다. '밑줄 친 황혼 사이로 오는' 너를 맞이하는 '나'는 성(性)의 비밀과 출생을 바다의 침몰 위에 올려놓고 밑줄을 친다. 타인의 품에 안겨 있는 자아의 영아를 대상화하여 초경혈 같은 떨림의 언어로 그려냈다. '배냇시절의 너를 안고 네가 나에게 온다'는 미적 환시(幻視)가 그것이다. 또 우리 시에서 사라진 '누이'가 새롭게 호명된 점도 심미적 충동을 새롭게 한 특이성이다. 여성 화자가 부르는 누이가 낯설지만 그들의 사랑이 어둠 속 바다로 사라졌다가 재생되는 사실에 화자는 눈뜨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오염시킨 자궁을 복원하려는, 우리를 향한 시의 반성적 저항이다.

리듬을 놓지 않고 저 너머의 핏놀빛 아침을 보게 한 것 자체가 경이이다. '모든 것들의 처음과 끝인''너'는 여성이며, 타자들은 "모든 저물어가는 것들의 누이"를 부를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사라졌지만 기억 속에 있는 우리 시의 한 언어이자 핵과 같은 운명이다. 10대 후반의 시인으로서 두려워하지 말고 깊은 곳으로 몸을 낮춰 영혼을 깎는 시를 쓰기 바란다.

◆ 심사위원=김명인.고형렬(대표집필 고형렬)


 

동아일보 당선작 없음

 

심사평

김명인(시인·고려대 교수), 김혜순(시인·서울예대 교수)
(예심 최영미 장석남)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시들은 대부분 비슷했다. 현실을 벗어나 비상한 시들보다는 친근한 일상을 그대로 묘사한 시들이 많았다. 그런데 왜 그런 일상을 하필이면 시라는 장르로 써야만 했는지, 장르적 자의식이라는 것이 있었는지, 일상을 얼마만큼의 시적 사유를 통해 해석하고, 표현하고 있는지 묻고 싶었다. 간혹 현실을 비틀어 풍자를 길어 올린 시들도 있었지만 비문, 오문이 많거나 설명의 문장들을 생경하게 노출시킨 시행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무릇 한 사람이 문학 작품, 그 중에서도 시를 쓴다는 것은 자신의 경험과 감각, 고뇌 속에서 그 누구도 쓰지 않은 자신만의 문장, 어법, 이미지를 발견, 발명해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용임의 ‘해바라기 모텔’은 시의 대상이 된 부조리한 상황을 능청스럽게 제시하는 솜씨가 돋보였지만, 시에 나타난 국면들엔 구체성이 부족했다. 박혜정의 ‘흑백의 목련나무’는 경쾌하고 발랄한 리듬과 청각적 이미지가 눈에 띄었으나 인생에 대한 해석이 헤프거나 상투적 상상력의 전개가 있었다. 문정인의 ‘붉은 다라이 공장에서’는 외국인 노동자의 비감을 경쾌하게 다루었으나 상투적 비유들, 묘사를 위한 묘사 문장들이 시의 신선함을 가라앉혀 버렸다. 반복해서 읽고 또 읽으면서 논의에 논의를 거듭했으나 단 한 편의 완성도가 있는 작품, 새로운 목소리가 들리는 작품, 가능성을 배태한 한 시인을 찾지 못했다.


신춘문예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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